아서 세실 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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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서 세실 피구는 영국의 경제학자로, 외부성 개념과 피구세를 통해 외부성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20년 저서 《후생 경제학》에서 후생 경제학에 기여했다. 피구는 케인스 경제학에 비판적이었으며, 피구 효과를 통해 경제가 자체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저작은 일본을 통해 한국 경제학 연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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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세실 피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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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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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77년 11월 18일 |
출생지 | 라이드, 와이트 섬, 영국 |
사망일 | 1959년 3월 7일 |
사망지 | 케임브리지, 케임브리지셔, 영국 |
학문 | |
분야 | 후생경제학 |
모교 | 킹스 칼리지케임브리지 대학교 |
소속 | 케임브리지 대학교 |
사상적 영향 | 앨프레드 마셜, 헨리 시지윅 |
주요 기여 | 외부 효과 피구 효과 피구세 피구 클럽 |
반대 |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영향을 준 인물 | 그레고리 맨큐 앨런 그린스펀 폴 볼커 폴 크루그먼 |
학파 | 신고전파 경제학 (케임브리지 학파) |
수상 | |
수상 내역 | 1899년 Chancellor's Gold Medal 1903년 Adam Smith Prize |
2. 생애
아서 세실 피구는 아일오브와이트 주 라이드에서 군 장교인 클래런스 조지 스콧 피구와 그의 아내 노라 비델 프란시스 소피아(존 리스 3대 준남작의 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해로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뉴랜드 하우스에 소속되었고, 학교의 첫 번째 현대적인 학장이 되었다. 학교의 경제학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피구 학회라고 명명되었다. 1896년 그는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역사학 장학생으로 입학하여[3] 처음에는 오스카 브라우닝 밑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1899년 총장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1901년 콥든상, 1901년 버니상, 1903년 애덤 스미스상을 수상했으며, 1900년 회장을 역임한 케임브리지 유니언 학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도덕 과학 삼단 논법 아래에서 철학과 윤리를 연구하면서 경제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알프레드 마셜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나중에 정치 경제학 교수로 그의 뒤를 이었다. 킹스 칼리지의 펠로우십에 대한 그의 첫 번째이자 실패한 시도는 "종교 교사로서의 브라우닝"에 대한 논문이었다.
피구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에게 몇 가지 문제로 이어졌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해야 하는 군 복무에 대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머물렀지만, 방학 동안에는 프렌즈 구급대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전선에서 일했으며, 특히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 전쟁 말기에 그는 마지못해 무역 위원회의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업무에 대한 적성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컨리프 위원회의 통화 및 외환 위원회 (1918-1919), 소득세에 관한 왕립 위원회 (1919-1920), 그리고 챔벌린 위원회의 통화 및 잉글랜드 은행권 발행 위원회 (1924-1925)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마지막 위원회의 보고서는 기존의 환율로 금본위제를 복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서막이 되었다. 피구는 1925년 영국 학사원에 선출되었지만, 1947년 나중에 사임했다. 만년에는 국가적인 일에서 물러나 더 학문적인 경제학에 전념하고, 시사 문제에 대해 ''더 타임스''에 무게 있는 편지를 쓰는 데 몰두했다. 그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 명예 회원, 린체이 아카데미의 외국 회원, 그리고 국제 경제 위원회의 명예 거주자였다.
그는 산과 등산을 매우 좋아했으며, 윌프리드 노이스 등 많은 친구들에게 등산을 소개했고, 그들은 훨씬 훌륭한 등반가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에 그의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이 발생하여 활력을 잃었고, 등산을 줄이고 남은 생애 동안 쇠약해지는 시기를 겪게 되었다. 피구는 1943년에 교수직을 사임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킹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남았다. 만년에는 점차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강의를 하거나 산책을 하기 위해 가끔 방에서 나왔다.
피구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만년에 좋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정치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좋아했다.
2. 1. 학문적 생애
아서 세실 피구는 아일오브와이트 주에서 태어났다.[4] 1901년부터 경제학 강의를 시작했고, 이후 30년 동안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의 교육 기반이 된 2학년 학생들을 위한 고급 경제학 강좌를 개설했다. 초기에는 경제학 외에도 다양한 과목을 강의했으며, 1902년 3월에는 킹스 칼리지 펠로우가 되었고,[4] 1904년 여름에는 기들러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학 교리의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저서를 출판했다. 특히 알프레드 마셜 밑에서 공부했으며, 후생 경제학에 매료되어 구매, 판매, 노동과 관련된 개인의 결정과 생산 및 고용과 관련된 기업의 결정 등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연구했다.[5] 그의 초기 저작은 1903년 애덤 스미스 상을 수상한 에세이를 확장한 ''산업 평화의 원리와 방법''과 같이 후기 저작보다 더 철학적이었다.1908년 피구는 알프레드 마셜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 경제학 교수로 선출되어 1943년까지 재직했다. 1909년에는 토지 가치세를 지지하는 에세이를 썼는데,[6] 이는 로이드 조지의 인민 예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알프레드 마셜의 토지 가치세에 대한 견해는 그가 부정적 외부성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영감이 되었다.[7]
피구는 1920년 ''후생 경제학''에서 외부성의 개념과 피구세를 통해 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는 부정적 외부성은 세금으로, 긍정적 외부성은 보조금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1960년대 초, 로널드 코스는 거래 당사자들이 협상할 수 있다면 세금과 보조금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피구의 분석을 비판했다. 외부성 개념은 현대 후생 경제학, 특히 환경 경제학의 핵심이며, 그의 이름을 딴 피구 클럽은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다.
피구는 노사 협상, 임금 경직성, 내부 노동 시장, 분할된 노동 시장 및 인적 자본 등 다양한 노동 시장 현상을 분석했다.[2] 임금 경직성은 근로자의 소득이 노동 시장 상황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며, 이는 불황으로부터의 경제 회복을 늦출 수 있다.[8] 1933년 출판된 ''실업 이론''에서 그는 임금 경직성, 시장 가격으로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등 실업에 기여하는 많은 요인을 설명했다.[9][10][11][12][13] 마찰적 실업은 기능적 시장의 일부로 이해되었지만, 피구는 고용주가 노동에 대한 수요가 낮아 발생하는 다른 유형의 실업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14]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피구의 ''실업 이론''의 몇 가지 요점에 반박했지만, 마찰적 실업과 자발적 실업의 분리는 케인스의 ''일반 이론'' 출판 전까지 실업이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였다. 피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확률 이론을 연구하도록 개인적인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고,[16] 둘은 서로에게 큰 애정과 존경을 보였다. 피구는 일반적으로 케인스 경제학에 비판적이었으며, 피구 효과를 통해 경제가 케인스가 제안한 것보다 더 자체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9년 강연에서 그는 케인스의 저작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으며,[17] 후에 케인스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17] 케인스는 피구를 비판하며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최소 17번 언급하며 비하했다.[18]
2. 2. 케인스와의 관계
아서 세실 피구는 잉글랜드 아일오브와이트 주에서 태어났다.2. 3. 만년
피구는 컨리프 위원회의 통화 및 외환 위원회 (1918-1919), 소득세에 관한 왕립 위원회 (1919-1920), 그리고 챔벌린 위원회의 통화 및 잉글랜드 은행권 발행 위원회 (1924-1925)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마지막 위원회의 보고서는 기존의 환율로 금본위제를 복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서막이 되었다. 피구는 1925년 영국 학사원에 선출되었지만, 1947년 나중에 사임했다. 만년에는 국가적인 일에서 물러나 더 학문적인 경제학에 전념하고, 시사 문제에 대해 ''더 타임스''에 무게 있는 편지를 쓰는 데 몰두했다. 그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 명예 회원, 린체이 아카데미의 외국 회원, 그리고 국제 경제 위원회의 명예 거주자였다.그는 산과 등산을 매우 좋아했으며, 윌프리드 노이스 등 많은 친구들에게 등산을 소개했고, 그들은 훨씬 훌륭한 등반가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에 그의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이 발생하여 활력을 잃었고, 등산을 줄이고 남은 생애 동안 쇠약해지는 시기를 겪게 되었다. 피구는 1943년에 교수직을 사임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킹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남았다. 만년에는 점차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강의를 하거나 산책을 하기 위해 가끔 방에서 나왔다.
피구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만년에 좋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정치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좋아했다.
3. 주요 업적
피구는 1901년부터 경제학 강의를 시작했고, 이후 30년 동안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의 교육 기반이 된 2학년 학생들을 위한 고급 경제학 강좌를 개설했다. 초창기에는 경제학 외에도 다양한 과목을 강의했다. 1902년 3월, 두 번째 시도 끝에 킹스 칼리지 펠로우가 되었고,[4] 1904년 여름에는 기들러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학 교리의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는 데 전념했고, 그 결과 그의 세계적인 명성을 확립한 저서를 출판했다. 그는 특히 알프레드 마셜 밑에서 공부했으며 규범 경제학에 집중했다. 그는 구매, 판매, 노동과 관련된 개인의 결정과 생산 및 고용과 관련된 기업의 결정 등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연구하는 후생 경제학에 매료되었다.[5] 그의 초기 저작은 1903년 애덤 스미스 상을 수상한 에세이를 확장한 ''산업 평화의 원리와 방법''과 같이 후기 저작보다 더 철학적이었다.
1908년 피구는 알프레드 마셜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 경제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3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다.
1909년 그는 토지 가치세를 지지하는 에세이를 썼는데,[6] 이는 로이드 조지의 인민 예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알프레드 마셜의 토지 가치세에 대한 견해는 그가 부정적 외부성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영감이 되었다.[7]
피구의 가장 지속적인 기여는 1920년의 ''후생 경제학''으로, 그는 외부성의 개념과 외부성 문제를 피구세 부과(또는 "피구비안 세금"이라고도 함)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후생 경제학''(초기에는 ''부와 후생'')에서 피구는 마셜의 외부성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이러한 비용이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이 고려하지 않는, 타인에게 부과되는 비용이나 제공되는 이익이다. 피구는 부정적 외부성(부과된 비용)은 세금으로 상쇄해야 하고, 긍정적 외부성은 보조금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초 피구의 분석은 로널드 코스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코스는 거래 당사자들이 거래에 대해 협상할 수 있다면 세금과 보조금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외부성 개념은 현대 후생 경제학, 특히 환경 경제학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피구 클럽은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다.
피구의 저작에서 간과된 측면은 노사 협상, 임금 경직성, 내부 노동 시장, 분할된 노동 시장 및 인적 자본을 포함하여 후대 경제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노동 시장 현상에 대한 분석이다.[2] 임금 경직성은 근로자의 소득이 노동 시장 상황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불황으로부터의 경제 회복을 늦출 수 있다.[8]
실업 해결에 대한 피구의 기여는 노동 시장 외부성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 토대가 된다. 1933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실업 이론''은 임금 경직성, 시장 가격으로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등 실업에 기여하는 많은 요인을 설명한다.[9][10][11][12][13] 이 두 가지는 알프레드 마셜이 제시하고 피구가 강화한 요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마찰적 실업은 기능적 시장의 일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피구는 또한 사람들이 시장 임금으로 일하려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용주가 노동에 대한 수요가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유형의 실업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14] 4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로 실업이 발생하면서 영국은 대공황 훨씬 전부터 경제 불황을 겪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고용주들이 여성과 참전 용사를 계속 고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피구는 이러한 새로운 실업 요인은 제조업과 같이 가장 고통받는 산업에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썼다.[14]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피구가 그의 ''실업 이론''에서 제시한 몇 가지 요점에 반박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업이 마찰적이거나 자발적이라는 피구의 이론이다.[15] 그러나 마찰적 실업과 자발적 실업의 분리는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출판 전까지 실업이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이다.
그의 초기 행위 중 하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확률 이론을 연구하도록 개인적인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16] 피구와 케인스는 서로에게 큰 애정과 존경을 보였으며, 그들의 지적 차이는 개인적인 우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지 않았다.
피구는 일반적으로 케인스 경제학에 비판적이었으며, 경제가 케인스가 제안한 것보다 더 자체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실질 통화 잔고에 대한 피구 효과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1949년에 행한 몇 번의 강연에서 그는 케인스의 저작에 대해 더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저는... 케인스가 자신의 기본 개념을 설정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경제 분석의 무기고에 매우 중요하고 독창적이며 가치 있는 기여를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17] 그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케인스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17]
케인스는 반대로 피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피구를 최소 17번 언급하며, 종종 비하했다. 케인스는 "[피구]는 기술 변화로 인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은 경우 새로운 장비를 구식 장비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공식을 고안할 수 없다. 저는 피구 교수가 목표로 하는 개념이 경제 분석에 적합하고 적절한 개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단위 시스템이 채택될 때까지 정확한 정의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18]
피구의 저서는 방대하지만, 특히 "3부작", 즉 《후생경제학》(초판 1920년), 《산업 변동론》(초판 1927년), 《재정 연구》(초판 1928년)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고용에 관한 피구 효과를 주장하며, 창성기의 케인스 경제학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그 때문에 케인스, 케인스 서커스, 케인스주의자들과의 대논쟁을 일으켰다.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피구-케인스 논쟁이라고 불린다. 이 논쟁에서 사용된 피구의 케인스 경제학 비판은 현대 경제학에서도 중요한 케인스 경제학 비판으로 인식되고 있다.
3. 1. 후생경제학
아서 세실 피구는 알프레드 마셜의 규범 경제학에 영향을 받아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연구하는 후생 경제학에 매료되었다.[5] 1920년 출간된 그의 저서 《후생 경제학》에서 외부성의 개념과 피구세를 통해 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피구는 부정적 외부성은 세금으로, 긍정적 외부성은 보조금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1960년대 초, 로널드 코스는 거래 당사자들이 협상할 수 있다면 세금과 보조금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피구의 분석을 비판했다.[7] 그러나 외부성 개념은 현대 후생 경제학, 특히 환경 경제학의 핵심으로 남아있으며, 피구 클럽은 기후 변화 해결을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다.피구는 《후생 경제학》에서 마셜의 외부성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외부성은 타인에게 부과되는 비용이나 제공되는 이익이지만, 이를 창출하는 사람이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7] 또한, 그는 소득 재분배가 경제 전체의 산출량을 감소시키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경제적 후생을 증대시킨다고 보았다('''피구의 제2명제'''). 이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소득 재분배는 빈자의 더 강한 욕구를 충족시켜 욕구 충족의 총계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피구의 저작에서 간과된 측면은 노사 협상, 임금 경직성, 내부 노동 시장, 분할된 노동 시장 및 인적 자본을 포함하여 후대 경제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노동 시장 현상에 대한 분석이다.[2] 특히, 1933년 출판된 《실업 이론》은 임금 경직성 등 실업에 기여하는 여러 요인을 설명한다.[9][10][11][12][13]
3. 2. 외부효과와 피구세
아서 세실 피구는 알프레드 마셜의 영향을 받아 후생 경제학을 연구했으며, 특히 외부성 개념과 피구세를 통해 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7] 외부성은 어떤 경제 주체의 활동이 시장 메커니즘을 통하지 않고 다른 경제 주체에게 편익이나 비용을 발생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피구는 1920년 저서 《후생 경제학》에서 마셜의 외부성 개념을 발전시켜, 부정적 외부성(비용 발생)은 세금으로, 긍정적 외부성(편익 발생)은 보조금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1960년대 초 로널드 코스는 거래 당사자들이 협상할 수 있다면 세금과 보조금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피구의 분석을 비판했다.[7] 그러나 외부성 개념은 현대 후생 경제학, 특히 환경 경제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피구 클럽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피구는 또한 노사 협상, 임금 경직성, 내부 노동 시장, 분할된 노동 시장, 인적 자본 등 다양한 노동 시장 현상을 분석했다.[2] 특히 1933년 출판된 《실업 이론》에서 임금 경직성, 시장 가격으로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등 실업에 기여하는 요인들을 설명했다.[9][10][11][12][13]
3. 3. 피구 효과
아서 세실 피구는 외부성의 개념과 외부성 문제를 피구세(또는 "피구비안 세금") 부과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5] 후생 경제학(초기에는 ''부와 후생'')에서 피구는 마셜의 외부성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이러한 비용이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이 고려하지 않는, 타인에게 부과되는 비용이나 제공되는 이익이다.[5] 피구는 부정적 외부성(부과된 비용)은 세금으로 상쇄해야 하고, 긍정적 외부성은 보조금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1960년대 초 피구의 분석은 로널드 코스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코스는 거래 당사자들이 거래에 대해 협상할 수 있다면 세금과 보조금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외부성 개념은 현대 후생 경제학, 특히 환경 경제학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피구 클럽은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다.피구는 일반적으로 케인스 경제학에 비판적이었으며, 경제가 케인스가 제안한 것보다 더 자체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실질 통화 잔고에 대한 '''피구 효과'''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실질 자산 순잔고(자산 마이너스 부채)의 증가를 통해 소비가 자극되어 국민 소득이 증가하는 것을 '''피구 효과'''라고 한다.
이에 반해, 물가 수준 P의 하락 또는 명목 통화 공급 M의 증가로 실질 통화 공급 M/P가 증가했을 때, 이자율 하락을 통해 투자가 자극되어 고용 및 국민 소득이 증가한다. 이를 '''케인스 효과'''라고 한다.
1949년에 행한 몇 번의 강연에서 그는 케인스의 저작에 대해 더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저는... 케인스가 자신의 기본 개념을 설정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경제 분석의 무기고에 매우 중요하고 독창적이며 가치 있는 기여를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17] 그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케인스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17]
3. 4. 케인스 효과와의 비교
실질 자산 순잔고(자산 마이너스 부채)의 증가를 통해 소비가 자극되어 국민 소득이 증가하는 것을 '''피구 효과'''라고 한다.반면, 물가 수준 P의 하락 또는 명목 통화 공급 M의 증가로 실질 통화 공급 M/P가 증가했을 때, 이자율 하락을 통해 투자가 자극되어 고용 및 국민 소득이 증가하는 것은 '''케인스 효과'''라고 한다.
3. 5. 실업 이론
피구는 그의 저작에서 노사 협상, 임금 경직성, 내부 노동 시장, 분할된 노동 시장 및 인적 자본을 포함하여 후대 경제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노동 시장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2] 특히 임금 경직성은 근로자의 소득이 노동 시장 상황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며, 이는 불황으로부터의 경제 회복을 늦출 수 있다.[8]1933년에 출판된 ''실업 이론''에서 피구는 임금 경직성, 시장 가격으로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등 실업에 기여하는 많은 요인을 설명한다.[9][10][11][12][13] 알프레드 마셜이 제시하고 피구가 강화한 요인 외에도, 고용주가 노동에 대한 수요가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유형의 실업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14]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영국은 대공황 이전부터 경제 불황을 겪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고용주들이 여성과 참전 용사를 계속 고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피구는 이러한 새로운 실업 요인은 제조업과 같이 가장 고통받는 산업에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4]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피구가 ''실업 이론''에서 제시한 몇 가지 요점에 반박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업이 마찰적이거나 자발적이라는 피구의 이론이다.[15] 그러나 마찰적 실업과 자발적 실업의 분리는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출판 전까지 실업이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였다.
4. 케인스와의 논쟁
노동 시장에서의 실업 문제와 관련하여 고전파 입장을 취한 피구와 이를 비판한 케인스의 대립이 있다. 피구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가격의 신축성)을 긍정하는 고전파 입장에서, 노동 시장에서의 일시적인 실업은 '''가격 조정'''(명목 임금의 삭감에 따른 실질 임금의 하락)에 의해 소멸되어 "완전 고용"이 실현되므로 비자발적 실업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케인스는 고전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목 임금의 삭감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구매력의 저하는 물가 하락을 초래하여 실질 임금의 하락을 억제하는 반면, 국민 소득의 감소를 초래하여 실업자를 오히려 증가시킨다고 반론하며, "신축적인 임금이 지속적인 완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고전파의 가정을 부정했다[21]。
또한 현실의 노동 시장에서는 조합 활동 등으로 인한 명목 임금의 하방 경직성(최저 임금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다)이 존재함을 지적하며[22], 현재의 명목 임금 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직업을 얻었을 경우의 고용량으로서의 "완전 고용"이 실현되지 않고,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한다고 했다. 따라서 피구 등 고전파가 말하는 수급 조정 메커니즘은 노동 시장에서는 기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케인스는 비자발적 실업은 총수요 부족에 기인한다고 보고, 유효 수요의 정부에 의한 관리를 요구했다.
4. 1. 완전 고용 논쟁
아서 세실 피구는 노동 시장에서의 실업 문제와 관련하여 고전파 입장을 취했다. 피구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 즉 가격의 신축성을 긍정하며, 노동 시장에서의 일시적인 실업은 명목 임금 삭감에 따른 실질 임금 하락이라는 가격 조정을 통해 해소되어 "완전 고용"이 실현되므로 비자발적 실업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케인스는 명목 임금 삭감이 가능하더라도, 그로 인한 구매력 저하는 물가 하락을 초래하여 실질 임금 하락을 억제하고, 국민 소득 감소를 야기하여 오히려 실업자를 증가시킨다고 반박했다. 케인스는 "신축적인 임금이 지속적인 완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고전파의 가정을 부정했다.
또한 케인스는 현실의 노동 시장에서는 조합 활동 등으로 인한 명목 임금의 하방 경직성(최저 임금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다)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명목 임금 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직업을 얻었을 경우의 고용량으로서의 "완전 고용"이 실현되지 않고,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피구 등 고전파가 말하는 수급 조정 메커니즘은 노동 시장에서는 기능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케인스는 비자발적 실업이 총수요 부족에 기인한다고 보고, 정부가 유효 수요 관리를 통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2. 유효수요 관리 논쟁
아서 세실 피구는 노동 시장에서의 실업 문제와 관련하여 고전파 입장을 취했다. 피구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가격의 신축성)을 긍정하는 고전파 입장에서, 노동 시장에서의 일시적인 실업은 '''가격 조정'''(명목 임금의 삭감에 따른 실질 임금의 하락)에 의해 소멸되어 "완전 고용"이 실현되므로 비자발적 실업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1]이에 대해 케인스는 고전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목 임금의 삭감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구매력의 저하는 물가 하락을 초래하여 실질 임금의 하락을 억제하는 반면, 국민 소득의 감소를 초래하여 실업자를 오히려 증가시킨다고 반론하며, "신축적인 임금이 지속적인 완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고전파의 가정을 부정했다.[21] 또한 현실의 노동 시장에서는 조합 활동 등으로 인한 명목 임금의 하방 경직성(최저 임금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다)이 존재함을 지적하며[22], 현재의 명목 임금 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직업을 얻었을 경우의 고용량으로서의 "완전 고용"이 실현되지 않고,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한다고 했다. 따라서 피구 등 고전파가 말하는 수급 조정 메커니즘은 노동 시장에서는 기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케인스는 비자발적 실업은 총수요 부족에 기인한다고 보고, 유효 수요의 정부에 의한 관리를 요구했다.
5. 한국에 미친 영향
아서 세실 피구의 저작은 일본에서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의 경제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일본에서 번역된 피구의 저작들이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가 겐조(外)가 번역한 『피구 후생경제학』(동양경제신보사, 1953-1955)은 전후 한국 경제학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혼고 료의 『피구의 사상과 경제학 - 케임브리지의 지적 전개 속에서 -』(나고야 대학 출판회, 2007년)와 피구의 『부와 후생』(나고야 대학 출판회, 2012년), 『재정학』(나고야 대학 출판회, 2019년) 번역본 역시 일본을 거쳐 한국 학계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5. 1. 학문적 영향
아서 세실 피구의 저작은 일본에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기가 겐조 외 여러 명이 번역한 『피구 후생경제학』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 4권으로 동양경제신보사에서 출판되었다. 혼고 료는 피구의 사상과 경제학을 케임브리지 학파의 지적 전개 속에서 조명한 『피구의 사상과 경제학 - 케임브리지의 지적 전개 속에서 -』를 2007년 나고야 대학 출판회에서 출간하였다. 또한 혼고 료는 피구의 『부와 후생』(2012년)과 『재정학』(2019년)을 번역하여 나고야 대학 출판회에서 출간하였다.5. 2. 정책적 영향
아서 세실 피구의 저작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번역 및 연구되었다. 기가 겐조(外)는 『피구 후생경제학』(동양경제신보사, 1953-1955)을 번역 출간하였고, 혼고 료는 『피구의 사상과 경제학 - 케임브리지의 지적 전개 속에서 -』(나고야 대학 출판회, 2007년)를 저술하였다. 또한 혼고 료는 피구의 저서인 『부와 후생』(나고야 대학 출판회, 2012년)과 『재정학』(나고야 대학 출판회, 2019년)을 번역하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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